네로는 누구인가?
서기 37년에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로마 제국은 그의 삼촌 칼리굴라의 권력을 쥐고 있었고, 칼리굴라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망했다.
서기 49년,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취임식과 성과
네로는 세 살 어린 양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의붓형 브리타니쿠스를 누르고 54년 황제로 즉위했다.
집권 전반기에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세네카와 근위대 장교 브루스의 도움을 받아 선발되었다.
또한 로마 문화와 건축은 "로마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고 명령했다"는 믿음에 따라 발전했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여기고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지만 네로 시대에 지어진 화려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대전 당시 민심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감싸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해 뿌리 깊은 원한을 샀다는 이유로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친척을 죽이고 기독교인들을 억압하는 것
그러나 그는 55년 의붓형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59년 정치적으로 간섭한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62년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했다.
서기 64년 석유창고 사고로 로마의 참사가 일어나 대중을 혼란스럽게 했을 때 그는 로마제국의 신흥 종교인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로마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됐다.
1965년, 그의 선생님 세네카는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죽음.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두 번째 축제를 열었지만 정치는 문란했고 68년 주방위군에 반기를 들었다.
1968년 타라코네시스 총독 갈바에 의해 내전이 발발했고, 각 지역 주지사들도 이에 동의해 마침내 상원에서 '국가의 적'으로 선포됐다.
그는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해 해방노예 파온(Phaon)의 별장에서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섰던 자결했다.
예술가나 광대의 죽음.
네로는 권력을 잃은 4년여 동안 빙의된 사람처럼 점점 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1965년 발각된 피소 황제 암살 음모는 그런 흐름에 불을 붙였고, 이제는 반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물론 황제까지 조롱했다.
예의가 없는 사람들도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에 1960년 브리타니아, 66년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로마군이 타격을 받자 네로의 국방정책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1962년 그는 조용한 황후 옥타비아를 모함해 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난 팝파와 결혼시키고 결국 그녀를 살해한 것도 황제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게다가, 로마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변해서 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를 외면합니다. 마침내 빈덱스는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스페인의 총독 갈바를 황제로 임명했다.
네로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황금에 굶주린 군대는 오히려 반란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네로는 반란군이 주저 없이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혼란스러워했다
. 그는 "내가 갈리아에 가서 눈물로 호소하면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며 "파르티아로 도망갈 수밖에 없다"며 "그냥 로마를 갈바에게 넘기자"고 말했다. 이집트 총독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결국 경비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치자, 그는 하인 4명만 데리고 로마 교외의 한 빌라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미 부처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네로는 여러 고문 끝에 붙잡혀 살해되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하지만 이 연약한 인간은 자신을 찌르는 것을 망설였고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하인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31살이에요.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사라지는 방법이다!"
네로가 분명 위대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가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적어도 카이사르 이후 군벌들과는 다른 황제상을 수여했다.
다수 국민에게 인기 있는 정치를 하고 힘보다는 매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너그러운 광대가 악랄한 싸움꾼보다 더 나은 통치자가 되지 않을까? 그가 귀족, 지식인,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미움을 사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심한 낙인의 주인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네로 경기가 끝난 후 수에토니우스는 네로를 비열하고 욱하는 짓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말을 덧붙였다.
"그가 죽은 날은 그가 옥타비아를 죽인 날이었다. 전 세계가 환호했다. 시민들은 공짜 모자를 쓰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무덤에 봄과 여름 꽃을 바쳤습니다.
그의 동상을 세우고 토가로 덮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칙령을 내리고 마치 그가 살아서 황제로 군림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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